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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는 5시간 원맨쇼…동화책 읽기, 우보전술도 필리버스터 덧글 0 | 조회 14 | 2019-12-25 12: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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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의도 인싸’는 국회 안(inside)에서 발생한 각종 이슈와 쏟아지는 법안들을 중앙일보 정치팀 2030 기자들의 시각으로 정리합니다. ‘여의도 인싸’와 함께 ‘정치 아싸’에서 탈출하세요.  
첫 빌리버스터 주자로 나선 자유한국당 주호영 의원. 주 의원은 이날 4시간 동안 발언석을 지키며 무제한 토론을 벌였다. [김경록 기자]

첫 빌리버스터 주자로 나선 자유한국당 주호영 의원. 주 의원은 이날 4시간 동안 발언석을 지키며 무제한 토론을 벌였다. [김경록 기자]

 

[여의도인싸]

역대 세 번째 필리버스터가 시작된 23일.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의 불은 밤새 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열기로 가득했던 건 아닙니다. 발언자로 나선 의원들은 종종 한숨을 내쉬었고, 오랜 시간 이어진 발언으로 목소리도 잔뜩 잠겼습니다. 일부 의원들은 좌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습니다.
 
고성과 욕설도 자주 오갔습니다. 발언자로 나선 의원이 막말을 내뱉으면 좌석에선 야유·욕설이 터져 나왔고, 결국 다툼으로 번졌습니다. 두 번째 발언자인 더불어민주당 김종민 의원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자유한국당 권성동 의원은 졸고 있던 문희상 국회의장에게 “졸지 마세요. 정신 좀 차리시고. 나잇값을 하나 자릿값을 하나”라고 쏘아붙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문 의장은 잔뜩 화난 표정으로 “의장을 모독하면 국회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맞받았습니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24일 새벽 국회 본회의장의 풍경은 이랬습니다.
 

떼쓰기인가 토론인가 



여야 의원 간 무제한 찬반 토론이 밤을 새워 계속되자 국회 본회의장에 자리한 일부 의원들은 꾸벅꾸벅 졸거나, 아예 엎드려 잤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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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제도를 없애지 않느냐”고 의문을 갖는 분들도 계실 텐데요. 필리버스터는 소수당이 다수당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한 취지로 도입됐습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토론의 형식을 빌려 합법적으로 의사 진행을 방해할 수 있는 민주적 제도이기도 합니다.
 
필리버스터(filibuster)는 해적을 의미하는 네덜란드어(vrijbuiter)에서 유래했습니다. 19세기 초에는 ‘무허가 용병 단체’를 의미하는 단어로 활용됐다고 합니다.
 
자유한국당에서 필리버스터 첫 주자로 나선 주호영 의원은 4시간 동안 발언석을 지켰습니다. ‘오래 버티기’를 염두에 두고 성인용 기저귀까지 준비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주자였던 김종민 의원 역시 4시간 31분간 발언했습니다. 쉬지 않고 4시간 넘게 말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김 의원처럼 다수당 의원이 필리버스터를 하는 것도 진기한 광경이지요. 
 

최장 필리버스터는 24시간18분 

하지만 이 정도로 놀라긴 이릅니다. 세계적으로 역대 최장 필리버스터는 24시간 18분에 달합니다. 1957년 8월 28일 미 의회에 상정된 인종차별 금지 법안에 반대해 발언석에 나선 스트롬 서먼드 상원의원의 기록입니다. 당시 서먼드 의원은 시간을 끌기 위해 성경책·독립선언서는 물론 조지 워싱턴 전 대통령의 퇴임 연설문까지 읽었습니다. 화장실을 가지 않기 위해 발언석 옆에는 대형 양동이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2013년 '오바마 케어' 예산안 처리를 막기 위해 필리버스터에 나선 미 상원 테드 크루즈 의원. 크루즈 의원은 당시 동화책을 읽으며 21시간 19분을 버텼다. [연합뉴스]

 
2013년엔 일명 ‘오바마 케어’ 국면에선 관련 예산안 처리를 막기 위한 필리버스터가 벌어졌습니다. 당시 미 상원의 테드 크루즈 의원이 나섰는데, 성격책·연설문도 아닌 동화책이 동원됐습니다. 크루즈 의원은 ‘초록색 계란과 햄’이라는 책을 읽으며 21시간을 버텼습니다. 일본에선 독특한 필리버스터 수법이 활용됩니다. 이른바 ‘우보(牛步·소걸음)’ 전술입니다. 발언을 길게 하는 대신 기표장까지 아주 느리게 걸어가 투료 자체를 지연시키는 방식입니다.
 
다수당 독주를 막기 위한 전술들이 기발하긴 하지만 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악용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필리버스터를 도입한 것은 “반대 논리를 호소할 기회”를 제공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성경책·동화책을 읽거나 느린 걸음으로 걷는 것이 이같은 취지와 부합하는지는 의문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동료 의원에 대한 체포 동의안을 막기 위해 5시간 넘는 무제한 발언에 나섰다. 한국 정치 사상 최초의 필리버스터였다. [중앙포토]

 
한국에서 최초의 필리버스터에 나선 정치인은 김대중(DJ) 전 대통령입니다. DJ는 야당 의원 시절이던 1964년 법무부장관을 지낸 김준연 의원의 체포동의안을 막기 위해 5시간 19분간 발언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아무런 원고도 없이 즉석에서 반대 논리를 주장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결과적으로 DJ의 ‘원맨 쇼’ 덕분에 김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 표결은 무산됐습니다.
 
DJ 이후엔 40년 넘게 국회에서 필리버스터가 실종됐습니다. 1973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 선포와 동시에 의원 발언 시간을 30분으로 제한하는 국회법 개정이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필리버스터를 제한하자 문제가 더 커졌습니다. 법안 통과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의원들은  조직폭력배나 들고 다닐법한 빠루(쇠 지렛대)·전기톱은 물론 최루탄까지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동물 국회’가 된 겁니다.
 
결국 2012년 5월 국회선진화법이 통과되며 필리버스터가 부활했습니다. 이후 4년만인 2016년 2월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이 정의당·국민의당과 공조해 테러방지법을 저지하기 위한 필리버스터에 나섰습니다. 당시 총 38명의 의원이 192시간 동안 발언하는 기록을 세웠는데, 이종걸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는 12시간 31분간 발언석을 지켰습니다.
 


23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문희상 국회의장에게 항의하기 위해 몰려든 자유한국당 의원들. 김경록 기자

 
일단 한국당의 필리버스터는 임시국회가 종료되는 25일 자정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당 입장에선 크리스마스의 시작과 끝을 필리버스터로 맞는 셈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민주당은 26일부터 곧장 새 임시국회를 열어 우선 선거법 개정안을 표결한 뒤, 사법개혁법안(공수처법·검경수사권조정법안) 등까지 상정한다는 계획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대로라면 연말·연초까지 필리버스터가 계속 이어질 전망입니다. 민주당과 한국당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대결을 벌이고 있습니다. 1년 넘게 선거법과 사법개혁법안을 논의해 놓고도 결국 파국을 피하지 못하는 건 한국 정치의 역량 부족이겠지요.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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